서론: 이름이라는 우주
이름은 단순한 호칭 그 이상이다. 그것은 한 인간의 존재를 증명하는 가장 확실한 표식이며, 사회적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어진 첫 번째 이야기다. 만금작명연구원의 성경순 원장이 이름을 ‘우리의 영혼을 담는 또 하나의 집’이라 표현했듯, 이름은 한 개인의 정체성과 세계관이 응축된 작은 우주와 같다. 사람은 이름을 가짐으로써 비로소 하나의 인격체로 존중받고 타인과 관계를 형성하기 시작한다. 속담에 ‘땅은 이름 없는 풀을 내지 않는다’는 말이 있듯, 하찮은 미물조차 이름이 있는데 만물의 영장인 사람에게 이름이 없다면 그 존재 의미를 찾기 어려울 것이다.
이처럼 이름을 짓는 행위는 한 개인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중대한 철학적, 문화적 실천이다. 이름은 때로 그 사람의 실제 모습과 특성을 반영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염원과 기대를 담아 현실을 초월하거나 미래를 만들어가려는 의지를 담기도 한다. 터키에서는 아이가 태어난 날이나 계절과 관련된 이름을 짓는 문화가 있고 , 동양과 서양은 개인과 공동체를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만큼이나 이름에 부여하는 가치가 다르다.
본고는 이처럼 다양한 문화권의 작명 전통을 심도 있게 비교 분석함으로써, 이름이라는 작은 그릇에 각기 다른 문화와 철학, 그리고 세계관이 어떻게 담기는지 탐색하고자 한다. 한국의 복합적인 작명 철학을 시작으로 아이슬란드, 가나, 인도, 북미 원주민의 독특한 사례를 거쳐, 세계화 시대에 이름이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를 조망하며 이름의 의미를 글로벌 시각에서 확장하는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이름이 단순히 개인을 식별하는 기호를 넘어, 한 문화가 ‘개인은 누구이며, 어디에 속하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에 어떻게 답하는지를 보여주는 거울임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제1장: 한국의 이름 - 가문, 철학, 운명의 유산
한국의 이름은 한 개인의 정체성을 넘어 가문과 공동체, 나아가 우주와의 관계까지 담아내는 복합적인 체계를 갖추고 있다. 이는 동아시아 문화권의 독특한 특징을 보여주는 동시에, 현대 사회의 변화 속에서 전통과 개인의 가치가 어떻게 충돌하고 융합하는지를 보여주는 생생한 사례다.
1.1. 혈통의 무게: 항렬(行列) 시스템
전통적으로 한국의 이름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한 것은 ‘항렬(行列)’ 시스템이다. 항렬은 단순한 작명 관습이 아니라, 같은 혈족 내에서 세대 간의 위계와 질서를 명확히 하기 위한 일종의 ‘문중율법(門中律法)’으로 기능했다. 이 시스템 안에서 개인의 이름은 온전히 개인의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거대한 가문이라는 나무에서 자신이 어느 가지에 속하는지를 알려주는 좌표와 같았다. 처음 만난 같은 성씨의 사람에게 본관(本貫)과 항렬을 물어 촌수를 따지고 관계를 정립하는 것은, 이름이 개인의 정체성보다 집단의 정체성을 우선시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항렬자를 정하는 가장 보편적인 방법은 주자(朱子) 가문에서 유래한 오행상생법(五行相生法)이다. 이는 목(木)→화(火)→토(土)→금(金)→수(水)의 순서로, 각 오행을 의미하는 한자를 세대별로 번갈아 이름에 사용하는 방식이다. 예를 들어 김해 김씨 삼현파는 세대에 따라 ‘木’이 들어간 상(相), ‘火’가 들어간 용(容), ‘土’가 들어간 규(圭) 자를 항렬자로 사용한다. 이 외에도 십간(十干)이나 십이지(十二支), 혹은 숫자를 이용하는 등 가문마다 고유한 규칙이 존재했다. 항렬자를 사용할 때는 조상의 이름(諱)에 쓰인 글자를 피하는 ‘피휘(避諱)’ 문화가 엄격하게 지켜졌으며, 항렬자의 위치 또한 이름의 앞 혹은 뒤로 정해진 규칙을 따라야 했다.
이러한 항렬 시스템은 그 자체로 ‘청각적 족보(auditory genealogy)’라 할 수 있다.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도 상대방의 가문 내 위치와 세대 관계(예: 아버지뻘인 숙항(叔行), 아들뻘인 질항(姪行))를 즉각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하는 사회적 기술이었던 것이다. 이는 개인의 정체성이란 가문 내에서의 위치에 의해 규정된다는 강력한 집단주의적 세계관을 반영한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 이 견고했던 시스템은 급격히 약화되고 있다. 핵가족화로 대가족 및 문중의 의미가 희미해지고, 항렬자가 주는 ‘촌스럽다’는 인식과 작명의 자유를 제한한다는 점 때문에 젊은 부모들은 이를 기피하는 경향이 뚜렷하다. 그 대신 형제자매끼리만 특정 글자를 공유하는, 보다 좁은 범위의 ‘돌림자’ 문화가 그 자리를 대체하고 있다. 항렬의 쇠퇴는 단순히 작명 트렌드의 변화가 아니라, 한국 사회의 정체성 중심이 ‘문중’이라는 거대 집단에서 ‘핵가족’과 ‘개인’으로 이동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회학적 지표다.
1.2. 우주의 균형을 맞추다: 사주팔자(四柱八字)의 역할
한국 작명 문화의 또 다른 기둥은 ‘사주팔자’에 기반한 성명학(姓名學)이다. 사주란 사람이 태어난 연월일시(年月日時)의 네 기둥(四柱)을 간지(干支)로 나타낸 여덟 글자(八字)로, 개인의 선천적 기운(先天之氣)을 담고 있는 운명의 청사진으로 여겨진다. 작명은 바로 이 선천적 운명에 후천적 기운(後天之氣)을 더하여 부족한 것을 보완하고 삶의 균형(中和)을 맞추려는 시도다. 즉, 이름은 운명을 개선하기 위한 일종의 도구이자 기술인 셈이다.
전문 작명가들은 가장 먼저 사주를 분석하여 개인에게 부족하거나 필요한 오행(五行)을 찾아낸다. 그리고 그 오행의 기운을 가진 한자, 즉 자원오행(字源五行)을 이름에 사용하여 사주의 결함을 보완한다. 예를 들어 사주에 ‘불(火)’의 기운이 부족하다면 ‘밝을 병(炳)’이나 ‘빛날 희(熙)’와 같은 한자를 이름에 넣는 식이다. 이 외에도 이름 한자 획수의 합으로 길흉을 따지는 수리성명학(數理姓名學), 이름의 한글 발음이 갖는 음양오행의 조화를 살피는 발음오행(發音五行) 등 복합적인 원리가 적용된다. 한자 획수를 계산할 때도 글자를 쓰는 그대로 세는 필획법(筆劃法)과 부수의 원형 획수를 따르는 원획법(原劃法) 등 학파에 따라 견해가 나뉘기도 한다.
여기서 한국 작명의 독특한 철학이 드러난다. 이는 태어난 순간 운명이 결정된다는 ‘결정론적 세계관(사주)’과, 그 운명을 이름이라는 도구를 통해 바꿀 수 있다는 ‘인간 의지론’이 기묘하게 결합된 형태다. 이름은 수동적으로 부여받는 꼬리표가 아니라, 정해진 우주적 지도 위에서 자신의 길을 더 나은 방향으로 개척하기 위한 능동적인 평생의 도구가 된다. 이는 운명에 순응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을 극복하려는 한국 문화의 복합적인 심리를 반영한다.
1.3. 현대 한국의 이름: 과거와 현재의 대화
오늘날 한국의 작명 풍경은 과거의 유산과 현대적 가치가 공존하며 치열하게 대화하는 장이다. 전통적인 두 글자 한자 이름이 여전히 다수이지만 , 그 내용은 훨씬 다채로워졌다.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순우리말 이름의 부활이다. 과거 노비 계층에서 주로 쓰였던 순우리말 이름은 , 이제 ‘고아라’, ‘한예나’, ‘배누리’처럼 세련되고 아름다운 이름으로 재조명받으며 민족적 정체성을 표현하는 수단이 되고 있다. 또한, 과거 집안 어른이나 작명가가 정해주던 관행에서 벗어나 부모가 직접 부르기 좋고 예쁜 소리의 이름을 짓는 경향이 강해졌다. 이는 개인의 미적 취향과 개성을 중시하는 개인주의적 가치관의 확산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한자 이름의 영향력은 여전히 막강하다. 이는 한자문화권 내에서의 사회생활이나 유학, 출장 등에서 한자 이름이 갖는 실용적인 필요성 때문이기도 하고, 한자가 지닌 깊은 뜻을 통해 자녀에게 좋은 의미를 부여하고 싶은 부모의 마음이 반영된 결과이기도 하다. 법원조차 한글 이름에서 한자 이름으로의 개명은 비교적 쉽게 허가해주는 반면, 그 반대는 까다롭게 심사하는 경향이 이를 뒷받침한다.
이처럼 현대 한국의 이름은 하나의 거대한 이념적 각축장이다. 순우리말 이름을 통해 민족주의를, 부모가 직접 지은 독창적인 이름을 통해 개인주의를, 사주와 한자의 의미를 통해 전통주의를, 그리고 ‘유진(Eugene)’과 같이 외국어와 발음이 비슷한 이름을 통해 세계주의를 표방한다. 결국 21세기 한국의 부모가 자녀의 이름을 짓는 행위는, 이러한 경쟁하는 가치들 사이에서 어떤 것을 우선할 것인지 선택하는 중대한 선언인 셈이다.
제2장: 세계의 이름 초상화 - 네 가지 문화적 사례 연구
이름에 담긴 철학은 문화권마다 극명한 차이를 보인다. 한 개인의 정체성을 어디에 위치시키는지에 따라 이름의 구조와 의미는 전혀 다른 양상을 띤다. 아이슬란드, 가나, 인도, 북미 원주민의 사례는 이름이 단순한 명칭을 넘어 각 사회의 세계관을 어떻게 반영하는지 보여주는 흥미로운 창이다.
2.1. 아이슬란드: 아버지(그리고 어머니)의 이름으로
아이슬란드의 작명 시스템은 세습되는 ‘가족 성(family surname)’이 없다는 점에서 서구 사회의 보편적 전통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대신 아이슬란드인은 부칭(patronymic) 또는 모칭(matronymic) 제도를 사용한다. 이는 자녀의 ‘성’을 아버지나 어머니의 이름에서 파생시키는 방식이다.
예를 들어, ‘욘(Jón)’이라는 남성의 아들 이름은 ‘에이나르 욘손(Einar Jónsson)’, 즉 ‘욘의 아들(Jón’s son)’이 되고, 딸의 이름은 ‘에바 욘스도티르(Eva Jónsdóttir)’, 즉 ‘욘의 딸(Jón’s daughter)’이 된다. 이 때문에 한 가족 내에서도 자녀들의 성이 모두 다르며, 세대가 바뀌면 성도 계속해서 바뀐다. 이 시스템은 거대하고 역사적인 ‘가문’의 정체성보다는 부모와 자식 간의 직접적이고 현재적인 관계를 강조한다.
이 독특한 제도는 아이슬란드 문화 전반에 영향을 미쳤다. 전화번호부나 도서관 목록은 성이 아닌 이름(first name) 순으로 정리되며, 총리를 포함한 모든 사람을 이름으로 부르는 평등하고 비공식적인 사회 분위기를 형성했다. 최근에는 성평등 의식이 높아지면서 아버지 이름 대신 어머니의 이름을 따르는 모칭 사용이 증가하고 있으며, 2019년부터는 성별 중립적인 접미사 ‘-bur(child)’의 사용도 법적으로 허용되었다.
더욱 흥미로운 점은 국가가 이 전통을 적극적으로 보존하고 관리한다는 사실이다. 1991년 설립된 ‘인명위원회(Mannanafnanefnd)’는 새로 등록되는 이름이 아이슬란드어 문법 구조에 맞고, 전통에 부합하며, 당사자에게 창피를 주지 않는지를 심사하여 승인 여부를 결정한다. ‘Harriet’이나 ‘Camilla’처럼 아이슬란드어 알파벳에 없는 글자(c)를 포함하거나, 남성 명사인 ‘Blær(산들바람)’를 여성 이름으로 사용하려는 시도가 위원회에 의해 거부되어 논란이 되기도 했다.
결국 아이슬란드의 작명 시스템은 ‘역사적 유산(가문)’보다 ‘현재적 관계(부모-자식)’를 우선시하는 국가적 철학의 산물이다. 인명위원회는 고정된 성씨를 강제하는 대신, 살아있는 언어인 아이슬란드어 문법 안에서 이름이 올바르게 기능하도록 관리하는 ‘언어 큐레이터’ 역할을 수행한다. 이는 정적인 유물이 아닌, 역동적인 과정으로서 문화를 보존하는 독특한 모델을 제시한다.
2.2. 가나 아칸족: 태어난 요일의 이름
서아프리카 가나의 주요 민족인 아칸(Akan)족에게는 아이가 태어난 요일에 따라 이름을 지어주는 독특한 전통이 있다. 이 ‘요일 이름(day name)’은 단순히 태어난 날을 기념하는 것을 넘어, 그 사람의 영혼과 성격, 운명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고 믿어진다.
각 요일에는 고유한 남성 및 여성 이름과 그에 따른 상징적 의미가 부여된다. 예를 들어, 유엔 사무총장을 지낸 코피 아난(Kofi Annan)의 이름 ‘코피’는 금요일에 태어난 남성을 의미하며, 금요일은 ‘비옥함’ 또는 ‘방랑자’의 특성과 관련된다. 가나의 초대 대통령 콰메 은크루마(Kwame Nkrumah)의 ‘콰메’는 토요일에 태어난 남성을 뜻하며, 토요일은 ‘신’ 또는 ‘전투 준비’와 같은 의미를 지닌다.
요일 | 남성 이름 (의미) | 여성 이름 (의미) | |
일요일 (Kwasiada) | 콰시 (Kwasi) (우주) | 아코수아 (Akosua) (우주) | |
월요일 (Jowada) | 콰드오 (Kwadwo) (평화) | 아드오아 (Adwoa) (평화) | |
화요일 (Benada) | 콰베나 (Kwabena) (바다) | 아베나 (Abena) (바다) | |
수요일 (Wukuada) | 콰쿠 (Kwaku) (거미) | 아쿠아 (Akua) (거미) | |
목요일 (Yawóada) | 야우 (Yaw) (땅) | 야아 (Yaa) (땅) | |
금요일 (Fiada) | 코피 (Kofi) (비옥함) | 아피아 (Afia) (비옥함) | |
토요일 (Memeneda) | 콰메 (Kwame) (신) | 암마 (Amma) (신) | |
자료: 기반으로 재구성 |
이 이름은 아이가 태어난 지 8일 후에 열리는 ‘아웃도어링(Outdooring)’이라는 전통 작명식에서 공식적으로 부여된다. 이 의식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아칸족은 갓 태어난 아기가 세상을 둘러보러 온 영적인 존재일 수 있으며, 7일이 지나야 비로소 이 세상에 머물기로 결정했다고 믿는다. 8일째 되는 날, 아기는 처음으로 집 밖에 나와 공동체와 자연, 그리고 조상들에게 소개된다. 이 자리에서 장로는 아기의 혀에 물과 술(혹은 진)을 번갈아 묻히며 “이것이 물이라고 말할 때는 물이고, 술이라고 말할 때는 술이다”라고 말해준다. 이는 아이에게 진실과 거짓을 구별하고 올바른 도덕성을 갖고 살아가라는 가르침을 주는 상징적인 행위다.
아칸족의 작명은 인간의 선택이 아닌, 아이가 세상에 도착한 그 순간의 우주적 질서에 의해 이름이 결정되는 ‘우주적 시간의 각인(cosmological time-stamping)’이라 할 수 있다. 이름은 우주가 부여한 정체성이며, 아웃도어링 의식은 이 영적인 존재를 완전한 사회적 인간으로 전환시키는 통과의례다. 이름은 아이를 영혼의 세계에서 공동체의 세계로 인도하는 열쇠인 것이다.
2.3. 인도: 신, 별, 그리고 사회의 직물
인도의 작명 문화는 종교, 점성술, 사회 구조가 복잡하게 얽힌 거대한 태피스트리와 같다. 특히 힌두교의 전통 작명 의식인 ‘나마카라나(Nāmakaraṇa)’는 이러한 다층적 세계관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나마카라나는 보통 아기가 태어난 지 10일 혹은 12일째에 거행된다. 이 의식의 핵심은 점성술, 그중에서도 ‘나크샤트라(Nakshatra)’ 즉, 아이가 태어난 순간 달이 머물렀던 27개의 별자리(월수)에 있다. 베다 점성가는 나크샤트라를 분석하여 아이 이름에 사용될 길한 첫 글자나 음절을 정해준다. 이름은 부모의 소망이 아니라, 아이가 태어난 순간의 우주적 기운을 반영해야 하는 것이다.
출생 별자리 (나크샤트라) | 이름의 첫 글자/음절 | |
1. 아슈위니 (Aswini) | Chu (चू), Che (चे), Cho (चो), La (ला) | |
2. 바라니 (Bharani) | Lee (ली), Lu (लू), Le (ले), Lo (लो) | |
3. 크리티카 (Kritika) | A (आ), E (ई), U (उ), Ea (ऐ) | |
4. 로히니 (Rohini) | O (ओ), Va (वा), Vi (वी), Vu (वू) | |
5. 므리가시라 (Mrigashira) | We (वे), Wo (वो), Ka (का), Ki (की) | |
자료: 의 표를 기반으로 일부 발췌 및 재구성. 총 27개의 나크샤트라가 존재함. |
의식 당일, 아기는 목욕재계하고 새 옷을 입는다. 사제는 신과 조상들의 영혼에게 기도를 올리고, 아버지는 황금 막대로 쌀이 담긴 쟁반 위에 선택된 이름을 쓰며 신의 이름을 노래한 뒤, 아이의 오른쪽 귀에 이름을 세 번 속삭인다. 이로써 아이는 공식적으로 공동체의 일원이 된다.
인도에서는 한 사람이 여러 개의 이름을 갖는 경우도 흔하다. 나크샤트라에 따른 이름 외에도, 가족이 섬기는 신의 이름을 딴 이름, 태어난 달에 따른 이름, 그리고 일상에서 불리는 세속적인 이름 등이 주어질 수 있다.
이름의 구조 또한 지역과 종교에 따라 매우 다양하다. 마하라슈트라나 구자라트 주에서는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Mohandas Karamchand Gandhi)’처럼 아버지의 이름을 중간 이름으로 사용하는 부칭 제도가 있다. 남인도에서는 ‘H. D. 쿠마라스와미(H. D. Kumaraswamy)’처럼 출신 마을 이름과 아버지 이름을 자신의 이름 앞에 붙이기도 한다. 성씨는 카스트 제도를 반영하는 경우가 많으며 , 시크교도는 남성은 ‘싱(Singh, 사자)’, 여성은 ‘카우르(Kaur, 공주)’를 이름에 붙이는 등 종교적 정체성을 드러내기도 한다.
결론적으로 인도의 이름은 한 개인의 정체성을 담은 다층적 문서와 같다. 그것은 우주와의 조응(나크샤트라), 영적 소속(신), 사회적 위치(카스트), 그리고 가족 내 관계(부칭)를 동시에 기록한다. 이는 한 개인이 우주적, 영적, 사회적, 가족적 존재임을 동시에 인정하고, 이름이 그 모든 정체성을 아울러야 한다는 복합적인 세계관의 발현이다.
2.4. 북미 원주민 전통: 살아온 삶, 얻어지는 이름
‘북미 원주민의 이름’을 하나의 틀로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수백 개의 부족마다 고유한 언어와 문화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의 다양한 작명 전통 속에서 몇 가지 공통적인 철학적 실마리를 발견할 수 있다. 그 핵심은 이름이 고정된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삶의 여정을 따라 변화하고 성장하는 살아있는 실체라는 개념이다.
많은 원주민 문화에서 이름은 태어날 때 한 번 주어지고 끝나는 것이 아니다. 개인은 일생 동안 여러 개의 이름을 가질 수 있다. 어린 시절의 이름, 성인이 되면서 얻는 이름, 특별한 공적을 세우거나 영적인 체험을 한 뒤에 받는 이름 등이 모두 다르다. 예를 들어, 위대한 전사였던 ‘앉은 소(Sitting Bull)’의 아명은 ‘뛰는 오소리(Jumping Badger)’였고, 행동이 느리다고 해서 ‘느림보(Slow)’라는 별명으로도 불렸다. 이는 정체성이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삶을 통해 만들어지고 증명되는 과정이라는 세계관을 반영한다. 당신은 당신이 가진 이름이 아니라, 당신이 살아온 삶 그 자체인 것이다.
이름은 자연과의 깊은 연결을 통해 지어지는 경우가 많다. 동물, 식물, 바람, 강, 언덕과 같은 자연물이나 현상은 이름의 가장 중요한 원천이다. 알공킨족의 ‘아포니(Aponi)’는 ‘나비’를, 수족의 ‘차이톤(Chayton)’은 ‘매’를, 촉토족의 ‘탈룰라(Tallulah)’는 ‘뛰노는 물’을 의미한다. 이는 인간이 자연의 일부이며, 그 안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야 한다는 깊은 생태학적 철학을 담고 있다.
각 부족의 작명 의식 또한 독특하다. 호피(Hopi)족은 아기가 태어난 지 20일째 되는 날, 떠오르는 태양의 첫 빛이 아기의 이마에 닿는 순간 이름을 지어주는 신비로운 의식을 거행한다. 살리시(Salish)족은 부모가 지어준 유년기의 이름이 청소년기에 부족 지도자가 부여하는 새로운 이름으로 대체되는 ‘이름의 길(naming trail)’을 따른다. 수(Sioux)족은 출생 순서, 명예, 공적, 별명, 비밀 이름, 영적 이름 등 여섯 가지 종류의 복잡한 이름 체계를 가지고 있었다.
이처럼 많은 원주민 전통에서 이름은 한 사람의 정체성이 고정된 상태가 아니라 ‘되어가는(becoming)’ 과정임을 보여주는 가장 강력한 증거다. 이름은 정적인 꼬리표가 아니라, 삶의 여정을 비추는 역동적인 거울이다. 사람은 그저 이름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현재 삶의 단계에 부합하는 이름을 ‘살아내는’ 것이다.
제3장: 세계화 시대의 이름
국경의 의미가 희미해지고 문화가 뒤섞이는 21세기, 이름은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하고 있다. 세계화는 수천 년간 이어져 온 각 문화의 고유한 작명 전통에 강력한 영향을 미치며, 정체성을 표현하는 새로운 방식을 탄생시키고 있다.
3.1. ‘글로벌 이름’의 부상과 다문화 가정의 선택
세계화가 낳은 가장 뚜렷한 작명 트렌드 중 하나는 ‘국제적 이름(international name)’ 또는 ‘문화 중립적 이름(culturally neutral name)’의 확산이다. 이는 특정 문화권에 강하게 귀속되지 않으면서 여러 언어로 발음하기 쉽고 보편적인 매력을 지닌 이름들을 말한다. ‘레오(Leo)’, ‘미아(Mia)’, ‘카이(Kai)’, ‘노아(Noah)’, ‘소피아(Sofia)’와 같은 이름들이 대표적이다. 이러한 경향은 국가 간 인구 이동의 증가, 글로벌 미디어의 영향력, 그리고 부모들이 자녀의 미래를 국제적인 무대에서 활동할 것을 염두에 두고 이름을 선택하기 때문에 가속화되고 있다. 인터넷은 전 세계의 이름 정보를 손쉽게 접하게 함으로써 이러한 흐름을 더욱 부채질한다.
이러한 흐름의 최전선에는 다문화 가정이 있다. 이들은 두 개 이상의 문화를 잇는 다리가 되어, 새로운 작명법을 실험하는 선구자 역할을 한다. 다문화 가정의 부모들은 자녀의 복합적인 정체성을 이름에 담기 위해 다양한 전략을 구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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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편적 이름 선택: 알렉산더(Alexander)나 마리아(Maria)처럼 여러 문화권에서 통용되는 성서적 혹은 고전적 이름을 선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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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별 이름 부여: 한쪽 문화권의 이름을 이름(first name)으로, 다른 쪽 문화권의 이름을 중간 이름(middle name)으로 짓는다. 예를 들어, 미국인과 하와이 원주민 부모가 자녀에게 영어 이름과 전통 하와이안 중간 이름을 함께 주는 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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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융합 및 균형: 아일랜드계와 멕시코계 부부가 자녀에게 멕시코 성씨를 물려주는 대신 아일랜드식 이름을 지어주어 균형을 맞추거나 , 두 문화에서 모두 자연스럽게 들리는 이름을 찾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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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블렌딩: 두 문화의 요소를 창의적으로 결합하여 완전히 새로운 이름을 만들기도 한다.
이러한 선택은 단순히 예쁜 이름을 고르는 차원을 넘어, 자녀가 자신의 뿌리를 존중하고 복합적인 정체성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도록 돕는 섬세한 과정이다. 다문화 가정의 작명 방식은 단순한 문화 차용을 넘어, 진정한 의미의 문화 ‘합성(synthesis)’으로 나아가는 미래 작명 문화의 방향을 예고한다. 한국에서도 남원시와 같은 지방자치단체가 다문화 가정의 자녀에게 한국식 이름을 지어주거나 결혼이주여성의 개명을 돕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등, 이러한 변화에 사회적으로 대응하려는 노력이 나타나고 있다.
3.2. 아시아의 영어 이름 현상: 글로벌 자아를 위한 도구
동아시아, 특히 한국과 중국에서 나타나는 독특한 현상 중 하나는 국제적인 소통을 위해 본명과 별도로 영어 이름을 사용하는 것이다. 이는 세계화 시대의 정체성 관리가 얼마나 복잡하고 전략적으로 이루어지는지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사례다.
이 현상의 가장 큰 동기는 실용성, 즉 ‘발음의 편의성’이다. ‘철환’이나 ‘중석’ 같은 한국 이름, 혹은 ‘펑리’나 ‘웨이리아’ 같은 중국 이름은 알파벳 문화권의 사람들이 정확하게 발음하고 기억하기 매우 어렵다. 이는 비즈니스나 학업 환경에서 원활한 소통에 장벽이 될 수 있다. 따라서 ‘브라이언(Brian)’, ‘제이슨(Jason)’, ‘제니퍼(Jennifer)’, ‘에이미(Amy)’와 같은 영어 이름을 사용하는 것은 이러한 소통의 마찰을 줄이기 위한 효과적인 해결책이 된다.
이러한 관행은 일부 한국 대기업에서 조직 문화의 일부로 자리 잡기도 했다. 수평적 문화를 지향하고 외국인 직원과의 소통을 원활히 하기 위해 전 직원이 영어 이름을 사용하도록 권장하는 것이다. 물론 최근 카카오게임즈처럼 업무 효율성 저하를 이유로 다시 한국식 호칭으로 회귀하는 사례도 있어, 그 실효성에 대한 논의는 계속되고 있다.
이 현상을 자신의 문화적 정체성을 버리는 행위로 보는 것은 단편적인 시각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법적 이름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특정 상황에서만 영어 이름을 사용하는 ‘도구적 정체성’을 운용한다. 이는 언어 사용에서 나타나는 ‘코드 스위칭(code-switching)’이 정체성 차원으로 확장된 ‘오노마스틱 코드 스위칭(onomastic code-switching)’이라 할 수 있다. 즉, 가족이나 한국 사회에서는 본명을 사용하며 자신의 ‘핵심 정체성’을 유지하고, 글로벌 환경에서는 영어 이름이라는 ‘도구적 정체성’을 전략적으로 구사하는 것이다. 이는 자신의 뿌리를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세계 무대에서 효과적으로 자신을 표현하려는 현대 아시아인의 정교한 정체성 관리 전략을 보여준다.
결론: 이름에 무엇이 담겨 있는가? 모든 것.
‘이름에 무엇이 담겨 있는가?’라는 셰익스피어의 질문에, 우리는 이제 ‘모든 것’이라 답할 수 있다. 이름은 한 문명의 철학과 세계관을 담은 타임캡슐이며, 한 사회가 개인과 공동체, 우주와 맺는 관계의 방식을 드러내는 거울이다. 본고에서 살펴본 다양한 작명 문화는 인간으로 존재하는 방식이 얼마나 다채로울 수 있는지를 명확히 보여준다.
문화권 / 시대 | 정체성의 주요 준거 | 핵심 작명 원리 | 정체성에 대한 관점 |
전통 한국 | 가문 / 혈통 | 족보학(항렬) 및 우주론(사주) | 집단적, 위계적, 운명적이나 가변적 |
아이슬란드 | 직계 가족 | 부/모칭 혈통 | 개인적, 평등주의적, 현재 중심적 |
아칸족 (가나) | 공동체 / 우주 | 영적 시간 각인 (출생 요일) | 공동체적, 영적, 우주에 의해 부여됨 |
힌두교 (인도) | 사회 / 우주 / 가족 | 점성술 및 사회-종교적 매핑 | 다층적, 위계적, 우주적 |
북미 원주민 | 자아 / 자연 | 살아온 경험과 영적 여정 | 유동적, 획득적, 역동적, 수행적 |
세계화 시대 | 개인 / 글로벌 공동체 | 음성적 보편성 및 개인적 미학 | 개인주의적, 혼성적, 열망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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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표는 각 문화가 이름에 부여하는 가치의 핵심적인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한국의 이름이 가문의 역사(항렬
)와 개인의 운명(사주
)이라는 두 축 사이에서 정체성을 찾는다면, 아이슬란드의 이름은 오직 부모와의 현재적 관계만을 증명한다. 가나 아칸족의 이름이 우주적 시간과의 연결을 중시한다면, 북미 원주민의 이름은 개인이 살아온 구체적인 삶과 경험을 반영한다.
결국 현대 사회에서 이름을 짓는 행위는 그 어느 때보다 복잡하고 중대한 의미를 지닌다. 부모는 다음과 같은 근본적인 긴장 관계 속에서 선택을 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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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 대 개인: 이 이름은 아이를 특정 집단(가문, 카스트)에 귀속시키는가, 아니면 독특한 개인으로 구별 짓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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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 대 현대: 이 이름은 고대의 규칙(점성술, 혈통)을 따르는가, 아니면 현대적 미학과 글로벌 트렌드를 따르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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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대 세계: 이 이름은 특정 문화유산의 증표인가, 아니면 세계화된 세상을 향한 여권인가?
21세기의 아기 이름은 이 모든 질문에 대한 부모의 대답이다. 한 사람의 이름이 어떻게 지어지는지를 이해하는 것은, 그 사람이 속한 문화가 인간의 존재를 어떻게 이해하는지 들여다보는 가장 깊고 내밀한 창이다. 그 작은 이름 안에 실로 한 우주가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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